2005년 10월 30일 일요일

[펌]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펌]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 (1) | 바그너 환자의 망상 포스트 삭제 2005/10/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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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새롭게 피어나는 꿈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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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삶 즉 고통
(1) 암포르타스의 고통
(2) 고통의 전시장


2. 구원: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1) 수난(Leiden, Passion)
(2) 자비(Mitleid)와 보살행(mit-leiden)

3. 글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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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 즉 고통

(1) 암포르타스의 고통


극적 얼개의 표면에 우선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물론 암포르타스의 고통이다.

쿤드리의 유혹에 빠진 암포르타스는 성창(聖槍)을 잃고, 마법사 클링조어가 휘두른 그 성창에 찔린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이야기들은 이 사건을 시/공간적 중심에 놓고 엮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역시 표면적인 흐름 속에서는 주인공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 조차도 성배왕의 고통을 순수한 바보가 없애주리라는 예언 아래 묶여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극으로서의 <파르지팔>이 던지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면 그것은 '파르지팔'이 마침내 암포르타스의 고통에 동정을 느끼게 되는 장면(2막)에서 모두 해소될 수도 있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굳이 3막이 필요했던 것인가? 왜 파르지팔은 암포르타스를, 쿤드리를 바로 구원하지 못하고 긴 세월을 방랑해야만 했을까?

이 의문은 <파르지팔>의 모든 인물들이 자신에 주어진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으로 풀리지는 않을까?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로써 <파르지팔>이 담고 있는 보다 깊은 문제의식을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누가 또 고통받고 있는가?


(2) 고통의 전시장

무엇보다도 쿤드리를 보라. 구세주를 비웃은 죄로 영겁 속에서 무수한 생을 거듭살며 속죄를 위해 구세주를 찾아 세상을 헤메봐도 환상 속에서 다시 만난 구세주를 거듭 비웃어야만 하는 저주가 가져오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저주를 깨뜨릴 수 있는 자, 자신의 유혹을 견뎌낼 수 있는 자 즉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을 자에게 내민 손이 그들을 파멸시키는 순간 쿤드리는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다만 거친 한숨을 몰아쉰다.
"저 암포르타스도 강하지 못했어, 모두가 ... 너무도 약했어! 나처럼 모두들 내게 내린 저주로 몰락하고 마는구나! (Schwach auch er! Schwach.. alle! Meinem Fluche mit mir alle verfallen!)"

1막과 2막의 쿤드리가 자신의 상반된 모습을 다른 상태에서도 의식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연출 상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어떤 해석에 따르건 최소한 무의식적으로라도 아라비아에서 가져온 물약과 지칠줄 모르는 노고에 감사를 표하려는 암포르타스를 바라보는 것만큼 원인제공자 쿤드리에게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병주고 약주는 사람도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구원을 바라며 내미는 나의 손이 언제나 저주받은 유혹으로 해석된다면.

KUNDRY
(unruhig und heftig am Boden sich bewegend) (땅바닥에 쓰러진 그대로 초조하고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며)
Nicht Dank! Haha! Was wird es helfen? 고마워하지 말아요! 하하!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담?
Nicht Dank! Fort, fort! Ins Bad! 고마워하지 말아요! 어서, 어서! 몸을 씻어요!



그런 쿤드리를 지배하는 클링조어는 어쩌면 고통에서 자유롭지는 않을까? 아니, 이 클링조어의 절규를 들어보라. "이 끔찍한 괴로움이여! (Furchtbare Not!)"
그는 돈 지오반니 혹은 이아고 같은 확신범이 아니다. 이교도 출신인 그를 경멸하고 모욕했던 성배기사단은 끝내 그에게 속죄도, 성스러운 것으로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성스러움을 상징하는 성배와 성창을 향한 그의 염원(Sehnen)과 갈구(Drang)는 차츰차츰 그를 지배하는 고통의 굴레가 되어 원치 않았던 악역을 떠맡긴다. 클링조르의 요새와 성배기사단의 성이 대칭되듯 닮아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 '적'과 '나'는 본성상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일견 클링조어의 대척점에 서있는 듯 보이는 성배기사단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내용을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듯 해골로(렌호프 연출) 혹은 굳어버린 석조상(아이힝어 연출)으로 등장하는 선왕 티투렐의 현재 모습에서 성배와 성창을 하사받을 때의 성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삶에 대한 진정성이 없는 명령문으로만 존재하는 이념체계란 하나의 존재자로서의 이념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철저한 참담함이 아닐까.

성기사 구르네만츠도 벌써 1막부터 근심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der doch alles weiss)' 지혜로운 그라지만 그 지혜도 본질적 고통의 문제 앞에는 무력할 뿐이다. 헛된 기대와 노력을 뒤로 하고 세월은 흘러 언제나 정정할 것만 같았던 그도 선왕 티투렐을 앗아간 그 죽음 만을 기다리는 늙은 은둔자가 되었다(3막), 더 이상 희망을 품을 능력을 상실한 채 가실 일 없는 근심과 걱정으로 등까지 구부정해진 늙은이는 그런 자신을 알아보는 파르지팔에게 자조적으로 말한다.

GURNEMANZ
So kennst auch du mir noch? 날 아직도 알아본단 말이오?
Erkennst mich wieder, 이런 나를,
den Gram und Not so tief gebeugt? 깊은 근심과 걱정만큼이나 구부정해져버린 이런 나를?




성배기사들도 자기 존재의 이유와 목적은 오래전에 잊은 듯 성배의 빛으로 연명하는데 급급하다. 1막의 행진곡풍 합창은 언뜻 그저 건전하게만 울려퍼지는 듯 싶다. 그러나 그 노래가 더욱 '건전하게 울려 퍼질 수록' 일말의 의심도 섞여있지 않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은 더욱 심화된다. 폭력과 장조의 만남은 오히려 역겹고 메스꺼운 느낌을 자아내어야 할 것이다 - 마치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렌지>에서 폭력적 장면과 오버랩되어 '환희의 송가'가 울려퍼지고 이를 강제로 지켜보며 괴로워하는 알렉스(말콤 맥도웰 분) 그리고 이를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연구자들의 관계처럼, 환호하는 기사들의 중심에는 그들의 요구로 자기 의지에 반해 성배의 덮개를 벗겨내고 다시 상처가 벌어져 피를 흘리는 암포르타스가 있다.




(왼쪽: 베를린 슈타츠 오퍼에 새로 오른 아이힝어의 연출에서 성배는 바로 암포르타스의 심장으로, 그리고 끊임없는 폭력으로 고통받는 대지 혹은 지구로 치환되었다. 본 공연에 대한 짧은 평을 이 글 마지막에 달아 놓았다.)





그런데 성배기사들이 보이는 폭력성은 마치 사냥꾼들에 둘려싸여 구석에 몰린 '상처입은' 들짐승의 난폭함과 같다. 혹은 화생방실을 가득채운 지독히 매운 가스에 눈물콧물을 흘리다 옆사람을 밀치며 출구로 뛰쳐나가는 xxx번 훈련병의 무분별함과도 같다. 이러한 종류의 폭력은 집단과 제도에 의해 행사되기에 그로부터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폭력의 희생자들이 움켜쥐는 지푸라기 바로 그것이다. 쿤드리를 의심하고 괴롭히는 기사들의 모습도(1막) 보이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피해를 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가슴 속의 고통'(Herzeleide)라는 이름을 지녔던 파르지팔의 어머니, 뱃속의 자식을 보지 못하고 추적자들에 살해당하는 그의 아버지도 이러한 점에서 예외가 아닌 것이다. (파르지팔 자신의, 그리고 '더럽혀진 손'에 의해 신음하는 '성스러움=구세주=성배와 성창'의 고통에 대해서는 잠시 미루어 놓는다.)


한밤의 꿈 속에 나오는 수많은 타인의 얼굴들이 하나하나 어떤 식으로든 꿈꾸는 내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그래서 서로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섬뜩했던 적은 혹시 없는지? 예술가의 백일몽으로서의 예술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그 역할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예술가가 품은 생각과 이미지 곧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에게 이 세계가 모순에 가득찬 불완전한 것으로 비친다고 해도 그 이미지 자체는 완결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실제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필자는 마린스키극장-바덴바덴페스티벌 공동연출의 <투란도트>를 보고서야 비로소 푸치니가 동 작품의 모든 인물을 '그가 무엇을 욕망하는가'의 관점에서 파악해 인간에 있어 욕망의 문제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투란도트>는 '욕망의 전시장' 혹은 '욕망의 자연주의적 실험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이를 '고통의 전시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파르지팔>에서 각 인물들은 하나같이 상처입고 고통으로 괴로워하는데, 또한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각각의 인물들에서 '암포르타스'의 모습이 투영된다. 그리고 이 때의 '일반명사로서의' 암포르타스는 불특정의 인간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로서의 인간을 보편적으로 표상한다.


과거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를 흘렸던 성창은 다시 암포르타스를 찌르게 된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다면 암포르타스는 이를 통해 인간을 '대표해서'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진정한 치료는 물론, 그를 잊게 해주는 환상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이러한 고통이란 바로 존재의 고통, 어드덧 나서 어느덧 죽어야 하는 삶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고통일 것이다.

그 고통이 원죄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하든지 끊어내지 못한 인연의 끈에서 말미암는다고 말하든지, 아니면 후자를 더욱 분명하게 따져보아, 쇼펜하우어에 있어 어떻게 고대 인도 베다의 가르침이 낭만적 허무주의로 변형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때의 고통이란 무목적적 의지가 개별자들에게 강요하는 '살라! 욕망하라! 서로서로 물어 뜯으라!' 라는 명령에 우리가 복종하는 데에서 온다고 보든지 간에... 이 삶의 고통 자체는 하지만 그 어떤 종교나 사상이 아닌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임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계속)

[펌]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2) | 바그너 환자의 망상 포스트 삭제 2005/10/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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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새롭게 피어나는 꿈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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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삶 즉 고통
(1) 암포르타스의 고통
(2) 고통의 전시장

2. 구원: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1) 수난(Leiden, Passion)
(2) 자비(Mitleid)와 보살행(mit-leiden)


3. 글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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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원

(1) 수난(Leiden, Passion)


이와 같이 인류가, 아니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보편적인 고통에 대한 치유는 응당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암포르타스도 쿤드리도 클링조어도, 이 모든 이들이 진정 원한 것은 모두 단 한 가지, '구원'이었다.

그렇지만 만일 모두가 이겨내지 못할 고통 속에 있다면 과연 어떤 누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양 기꺼이 혹은 감히 다른 누군가에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이러한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파르지팔>에서 왜 하필 '순수한 바보'만이 구원자의 자격을 지닌 것인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앞서 '모든 자가 고통받고 있다'라고 적고는 '파르지팔'이란 인물이 느끼는 고통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지나쳤던 것에 대한 해명도 함께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잠시 논의의 속도를 늦춰 보아도 좋을까? 왜냐하면 이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 것이냐의 문제는 우선 구원해야할 고통이 어떤 원인에서 나온다고 보느냐에 따라 상이하게 파악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은, 그의 발목을 묶고 있는 족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본 <파르지팔>에서 바그너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음은 (바그너가 쇼펜하우어를 제한없이 받아 들인 것은 아님을 감안해도) 명백하다. 쇼펜하우어의 주저를 접하기 전이었던 <탄호이저>에서조차 발견되는 두 인물의 사상적 친화성은 놀라울 정도다.

바그너의 예술 만큼이나 매혹적인 쇼펜하우어의 사상인데다, 거기에 니체와 헤겔을 함께 초대하면 더욱더 흥미로울 듯하다. 하지만 필자는 <파르지팔>에 논의를 한정하기 위해,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라는 극중의 계시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려한다.

이제까지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상처(Wunde)' '고통(Schmerz)' '괴로움(Weh)' '고난(Not)' '수난(Leid)' 과 같은 말들을 당연한 개념인양 특별한 구분 없이 사용했다. 이것이 사실 큰 문제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꼭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중 '수난Leid'이라는 말의 특수성이다. 이 단어를 동사(leiden)로 바꿔보면 "(괴로운/부정적인/피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감수하다, 견디다, 앓다, 그것으로 고통받다"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괴로움'은 '고난'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우리가 그것을 경험함으로써만 그것은 존재한다. '고통'이나 '괴로움' 과 같은 말로 지칭되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흔히 '감정'이라는 근원적인 현상에게 부당하게 부여되는) 어떤 찰나적인, 스쳐 지나가는 심적 상태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고통받다leiden'라는 것은 단단한 현실이다. 그것은 외부세계와의 관계에 있어 수동적/피동적인 위치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인간에 있어 '경험하다' 혹은 '살다'라는 말의 다른 얼굴이다.

여기에 덧붙여 서양철학의 한 조류에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세상에 내던져졌다(geworfen)'다고 말하는 것도 <파르지팔>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귀담아 들어볼 만 하다. 일상적인 숙고로도 이 점은 자명해 보이는데,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태어나 자신의 호오에 무관하게 이미 결정되어져 있는 시대와 장소, 사회제도와 가족관계라는 망망대해 속에 조각배처럼 떠다니는 개인에게 닥쳐오는 (최소한 유한한 능력을 지닌 인간의 눈에는) 우발적인 사건들의 파도! 그 속에서 인간은 출발점에서부터 "- 되어지다"라고 일컬어지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가 문제로 삼는 고통은 엄격히 말해 삶 자체를 말하며,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은 곧 삶 자체로부터의 구원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수난(passion과 passive라는 두 단어를 비교해보라) 그리고 열반 직전 부처가 겪는 시련을 포함, 많은 종교적 진리의 완성은 스스로 고행을 택하든 남에 의해 박해를 받건 언제나 고난을 수반했다는 점을 떠올려 볼 만 하다.

<파르지팔>의 부제(Bühnen Weihefestspiel)는 무대신성제전극(舞臺神聖祭典劇), 신성무대축전극(舞臺神聖祭典劇)과 같이 때로는 거창하게 혹은 '무대 봉헌극'처럼 간결하게 번역되는데, '공연을 통해 (새로 열리는) 극장/무대를 신성하게 만든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독일에서 '집들이'는 약간은 농을 섞어 Einweihungsparty라고 한다.)
이와 같이 그 부제에서부터 예술을 통해 종교를 구원한다는 바그너의 이상이 담긴 본 작품에서 삶 즉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선 어떤 통과의례, 곧 삶(=고통)을 거치게 된다는 것은 앞서 보았던 종교적 원형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거대한(뻔뻔한) 역설이 아닌가? 아직 필자의 길고 난삽한 문장에 현혹되지 않은 이라면 바로 되물을 것이다. 고통을 없애달라는 기도 끝에 고통스러운 삶을 선물로 받은 격이 아닌가??

아니, 필자도 그러한 의문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바로 그렇다. 어쩌면 바로 그래서 "고통으로 깨달을지니(durch Leid wissend)"라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다음에서 보겠지만 "고통으로 믿으리니(durch Leid glaubend)"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부적절했으리라는 점도 분명하다.


(2) 자비(Mitleid)와 보살행(mit-leiden)

자비와 보살행이라니?! 비둘기, 빵과 포도주(=피), 성배와 성창이라는 가장 대중적인 기독교적 상징들이 등장하는 <파르지팔>에 대한 글에서 이렇게 불교용어를 써도 되는 것인가... 하고 묻는 분께는 된다...고 말씀드리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불교적(쇼펜하우어식으로 왜곡된 점을 감안해 '불교의'로 적지 않는다) 세계관이 어떻게 <파르지팔>에 스며들어 있는지에 대한 논의들, <파르지팔>로 표현하려던 바가 전달 되었다고 보고 중단된 바그너의 불교적 우화 <승리자들 die Sieger>에 대한 이야기 등은 몬살바트 사이트 등에서 훌륭하게 다뤄지고 있기에 굳이 사족을 달지 않는게 좋겠다.


다만 여기에서 최근 오페라연출자 하리 쿠퍼가 한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해 남긴 흥미로운 코멘트를 하나 소개한다. "만일 바그너가 <파르지팔>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분명 '자비심(필자주: 역시 Mitleid. 여기에선 '박애'나 '동정심'이 적절할까?)과 믿음'이라고 말했을 것이지, 결코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라고 쓰지 않았을 것이다."
( * 하리 쿠퍼 인터뷰는 필자 블로그의 꼭지글을 참조하시길)

설령 기독교가 불교와 '자비심/연민/박애/동정'의 가치는 공유할지라도 반면 '깨달음(Erkenntnis, 인식)'은 불교에서와는 달리 기독교에 있어 그 만큼의 지위를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믿음(Glauben)'이 놓인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종교의 우열을, 게다가 이런 피상적인 논의를 기화로 가리려 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앞서 말했든 구원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적 문제이다.

인물 '파르지팔'이 걸어갈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라고 적혀있는 고난과 방랑의 길이 지닌 의미가 중요하다.

이제야 간신히 글의 처음에서 제기했던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마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극으로서의 <파르지팔>이 던지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면 그것은 '파르지팔'이 마침내 암포르타스의 고통에 동정을 느끼게 되는 장면(2막)에서 모두 해소될 수도 있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굳이 3막이 필요했던 것인가? 왜 파르지팔은 암포르타스를, 쿤드리를 바로 구원하지 못하고 긴 세월을 방랑해야만 했을까?

달리 묻자면, 2막과 3막 사이의 대본으로 기록되지 않은 세월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자비심(Mit-leid)이라는 말에는 쌍둥이 형제들이 있다. 동정(Com-passion), 또 공감(Mit-gefühl, Sym-pathy)이 그들이다. 연민이나 박애도 빼놓지 말자. 이들이 뜻하는 것은 어원적으로도 내가 아닌 남의 고통을 나도 함께 '느낀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한번 저 계시를 막막한 심정으로 음미해 본다: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 그런데 어떻게 느낀다는 것을 통해 수 있을까?!

만일 느낌을 주관적인 감정 혹은 미적인 영역에, 앎을 객관적인 참의 영역에 각각 분리시킨다면 두 영역간의 이러한 이행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두 영역간에 이행이 가능하다면, 즉 "자비심으로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은 느낌도 앎도 '삶'이라는 것, 산다는 것, 체험하는 것의 다른 이름들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단초를 인문학적으로 짚어가면 미학에서는 예술론과 감성학의 관계, 그리고 미학과 인식론 및 윤리학의 공통분모를 찾는 문제로 연결되지 않을까 짐작한다.)

그렇게 보면 단순히 '경험한다/겪는다'는 것이 반드시 '느낀다'라는 것과 같은 뜻을 지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만일 삶을 산다는 것의 본질이 고통받는 것이라면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자보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자, 괴로워하는 자는 보다 구원을 향해 한걸음 앞에 있다고 하겠다. 이 점에서 최소한 <파르지팔>의 주요인물들은 질식할 것 같은 경건함으로(1막의 성배기사) 혹은 욕망에의 탐닉 속에서(2막의 '꽃') 자신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군중들에 대비된다. 파르지팔의 말을 빌리자면 "네 고통은 복되도다 (Gesegnet sei dein Leiden)"(3막).


그렇다면 고통을 느끼는 자 중 왜 '순수한/순전한 바보(der reine Tor)' 파르지팔만이 구세주의 자격을 부여받는가?

첫번째의 대답을 '모르는 자만이 새롭게 알 수 있다'라고 시작하면 너무 무모한가?

우선 '바보'라는 말에는 누구나 당연히 '아는' 것들을 모르는 자에 대한 '아는 자'들의 비난이 담겨있다. '순수한' 이라는 멋진 수식어는 '바보'라는 말에 붙어 "너 진짜 바보 멍텅구리로구나! du bist aber ein reiner Tor!" 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명제를 만든다.

GURNEMANZ
Was stehst du noch da? 너는 아직도 뭔가 하고 있는거냐?
Weisst du, was du sahst? 너는 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기나 하느냐?
(Parsifal fasst sich krampfhaft am Herzen und schüttelt dann ein wenig mit dem Haupte) (파르지팔은 경련이 난 것처럼 심장 언저리를 쥐어짜더니 이윽고 고개를 젓는다)
Du bist doch eben nur ein Tor! 아니 너 정말 그냥 바보일 뿐이로구나!


'모든 것을 다 아는 (der doch alles weiss)' 구르네만츠도, 윤회로 영원히 반복되는 세월동안 무수한 일들을 보아온 쿤드리도(denn nie lügt Kundry, doch sah sie viel), 성스러운 자 성배왕 티투렐도, 직접 계시를 들은 암포르타스도, 성스러움의 이면에서 사악한 마법을 알아낸 클링조어도 그 앎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너 정말 그냥 바보일 뿐이로구나!"라는 말을 할 때, 구르네만츠는 사실 자신도 모르는 맥락에서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두번째로, 자신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leiden) 자와 남의 고통까지 함께 괴로워하는(Mit-leid) 자의 차이를 숙고해 볼만 하다.

앞서 보았듯 개인에 있어 고통이 하나의 실체적 경험인 것처럼 자비심(Mit-leid)도 그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타인에 적선하듯 떠올리는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선 다른 이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새로운 '앎'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말하듯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죄'가 된다.


그 좋은 예가 될 '책상 살인자(Schreibtischmörder)'라는 말이 있다. 나치의 경험이 만들어 낸 이 단어는 매사에 얌전하고 규정과 관습에 따라 모범적으로 살는 듯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간이 거리낌없이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아이러니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평범한 삶을 위한 안전핀이 된다.

반면, 남의 고통을 느끼는 것 즉 자비심은 그 자체가 일상을 벗어나는 경험이자 실천이다. 자비심은 함께 고통을 겪는 삶으로,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보살행'으로 연결된다. 필자의 부족한 이해력의 한계 안에서나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참된 자비심(Mit-leid)는 곧 보살행(mit-leiden)이다.

그렇다면 우선 파르지팔은 더욱 '삶을 살아야만' 했다. 파르지팔이 자만하거나 쿤드리를 하찮고 부정한 여인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파르지팔은 자신이야말로 구원받아야 하는 비참한 자임을 깨닫았기에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뭇 사람의 눈에는 천해 보이던 여인의 발을 씻어주던 예수를 떠올려보라.) 따라서 이 유혹에 빠질 때 저주를 받는 것은 쿤드리 만은 아니다.

PARSIFAL
Auf Ewigkeit 영원히
wärst du verdammt mit mir 너는 나와 함께 지옥에 떨어지리
für eine Stunde 단 한시간 동안이라도
Vergessens meiner Sendung 내 소명을 잊은채
in deines Arms Umfangen! 네 품에 나를 맡긴다면


만일 <파르지팔>에 2.5막이 있었다면, 연출가들은 아마도 즐거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파르지팔의 수난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막중한 과제는 상상력이 풍부한 연출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만큼 매력적인 소재가 될 것이다. 피곤에 찌들어 귀가하는 일상인의 모습도 좋을테고 영문을 모르고 전쟁에 끌려왔던 병사의 귀향을 그려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켜졌으면 하는 것은 3막에서 파르지팔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일체의 희망을 잃어버린 채이어야한다는 점이다. 그는 암포르타스와 쿤드리, 그리고 클링조어에 못지 않은 절망을 그 심연까지 스스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하지만 파르지팔은 그 심연에서 나의 비참함이 너의 비참함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이러한 점에서, 극의 마지막에서 파르지팔이 성배의 덮개를 벗기고 성 밖의 세계로 나아가게끔 형상화한 쿠퍼의 연출은 보살행으로서의 파르지팔의 행로를 훌륭하게 마무리한 예가 아닌가 한다.


다시 적지만, 필자는 <파르지팔>을 그리고 <파르지팔>이라는 거울에 비쳐진 삶과 세상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논의가 종교나 특정 학문의 틀을 넘어선다면 구태여 그 이야기를 가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출세간(出世間)이 곧 입세간(入世間)이다. 도를 깨쳤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세간을 떠나서 별천지에 사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이제까지의 논의에 딱 들어맞지만 이는 하이데거를 해설하는 어느 원로철학자의 말이다. 혹은, 키에슬로브스키의 "세가지 색" 연작 중 '박애'를 상징하는 <빨강 Rouge>을 오랫만에 빌려와 오늘 저녁 함께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계속)

[펌]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 (3) | 바그너 환자의 망상 포스트 삭제 2005/10/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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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새롭게 피어나는 꿈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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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삶 즉 고통
(1) 암포르타스의 고통
(2) 고통의 전시장

2. 구원: 자비심으로 깨달을지니(durch Mitleid wissend)
(1) 수난(Leiden, Passion)
(2) 자비(Mitleid)와 보살행(mit-leiden)

3. 글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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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 밖에서 비로소 시작될 이야기: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

만일 이야기를 <파르지팔> 작품 자체에 국한해야 한다면, 이 세번째 글은 쓰지 않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나 계획없는 긴 글을 써야했던 동기는 바로 여기 어느 언저리에 있었던 것 같다. 지난 9월 11일 베를린 슈타츠오퍼 전후 재개관을 기념해 열린 <파르지팔> 공연의 리뷰를 쓰려던 것이 원래의 의도 였지만, 솟아나는 무수한 상념들을 옆으로 밀어 놓은 채 어느 가수가 노래를 잘했더라 하는 식의 글을 쓰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반면 이 상념들을 잠정적으로라도 정리해 보려니 그 무게에 눌려 글을 시작하지도 못한 채 한 달이 훨씬 지난 주말에야 겨우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이제야 적자면 필자는
"구세주에게 구원을! (Erlösung dem Erlöser!)"이라는 말로 끝나는 <파르지팔>에서 자율성(Autonomie)의 문제를 떠올렸다. 자율성의 문제라는 말은 달리 적자면 어떻게 수동적인 상태에서 스스로 능동적인 상태 혹은 자유로운 상태로 나아갈 수 있느냐의 질문이다.


<파르지팔>의 얘기로 다시 돌아오자. 앞의 글에서 본 악극의 모든 인물이 고통받는다고 썼다. 이제 그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고통받는 '구세주=성스러움=성배와 성창'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구원(Erlösung)이라는 말에는 묶인 것을 풀어낸다는(lösen), 곧 해원(解寃)의 의미가 들어있다. 암포르타스를 구원한다는 말은 그에 부여된 직무(Amt)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준다는 뉘앙스가 있다면(이 부분은 몬살바트의 한
컬럼에서 이미 지적된 바 있다), 그렇다면 '구원자'가 짊어진 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구원자 혹은 구세주에게 구원을 바라는 타율적인 시선 자체가 아닐까? 물론 구원자가 구원을 기다리는 가엾은 이를 귀찮아 하거나 부담스러워 할 리는 없다. 문제는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 고통이고 그 근원적인 존재의 고통이 인간의 수동성에서 말미암는다고 했을 때, 과연 내가 아닌 남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이 해결방안이 될 수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대승불교의 보살행에 대한 설명에는 흥미로운 점이 많은데, 문외한의 입장에서 참으로도 용감히 이를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보살은 일체중생을 구제하려고 열반에 들지 않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로 보살에 의해 구제되는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신 안에서 불성을 깨닫는 것을 통해) 각자를 구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행은 이러한 의미에서 보살의 '자기' 수행과 동일할 것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요, 살며 살게하라(Live and let live)는 지혜이다.

그리고 이럴 때, 고통받는 자에게 내미는 손길은 더이상 '함께 슬퍼하는 것도 함께 고통을 겪는 것도 Mit-Leid(en)'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차라리 "함께 기뻐한다 Mit-Freude"는 말로 비로소 제대로 전달된다.

간단히 말해, 구원은 자율성의 회복이며 고통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잠정적인 결론은 그러나 과연 쇼펜하우어 사상에 탐닉했던 바그너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가장 그 영향의 심도를 잘 드러내는 작품의 하나일 <파르지팔>과 어울릴 수 있을까?


이제까지 이 글에서 우리는 삶은 고해(苦海)요, 쇼펜하우어 식으로 말하자면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무목적적 의지를 마치 자신의 개별적 욕망인양 받아들인 개인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욕망과 충돌하고 폭력이 출현하며 결국 모든 개별자는 충족되지 않는 자신의 욕망, 그리고 타인의 욕망의 도구로 전락되어야 하는 고통 아래에서 괴로워하게 된다'는 세계관을 바그너의 악극과 함께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말하자면 그런 세계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한 늑대(homo homini lupus)"이다. '타인의 권리가 시작되는 곳에서 나의 권리는 끝나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세계에서 구원이란 일시적으로는 예술의 도움을 통해, 항구적으로는 삶의 덧없음에 대한 정관을 통해 저 무목적적 의지에 봉사하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물론 이로써 고통은 극복된다. 하지만 끝에 찾아오는 정서는 필자가 지금 '구원'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활기찬 기쁨, 무엇인가 새롭고 자유로운 질서를 함께 구성해나가는 즐거움에 비해서는 정(靜)적인 인상을 준다.


반면, 어리석음과 폭력이 반복되는 잔인한 현실을 함께 바라보면서도 "만인은 만인에 대한 신(神)(homo homini deus)"이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으니 바로 스피노자다. 고통받는 이들을 더 이상 동정하지 말라고, 동정이 아닌 사랑을 외친 자가 있으니 니체다. 어쩌면 고통받는(leidend) 신(神) 디오니소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삶의 필연적인 수동성, 그에 따르는 고난, 절망과 슬픔의 정서을 바탕에 깔고 시작한다. 그렇지만 유한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수동적인 체험 속에서도 자신 안의 신적 본성을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어 이로써 점차 자유로워지며(스피노자), 오히려 가장 쓰디쓴 운명까지 모든 수동적인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운명에 대한 사랑, amor fati)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니체), 갈기갈기 찢겨졌던 신은 죽음을 딛고 부활한다(디오니소스).

이렇게 볼 때, 필자가 <파르지팔>을 듣고 보며 쫓아온 생각의 끝은 쇼펜하우어나 바그너가 생각했던 길과는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심취해있던 1858년 10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 보낸 한
편지를 보면 자신의 본성 그리고 예술적 성취의 근원이 연민(Mitleid)임을 고백하면서도 사랑 속에서 너무도 어렵게 얻어지는 기쁨(Mit-Freude)은 그에 대한 단순한 보완 이상이라고 적고 있음이 흥미롭다. '이 순간의 바그너' 그리고 '25년 후 <파르지팔>을 완성하는 바그너'(같은 편지에서 한참 후에나 마무리될 <파르지팔> 3막에 대해 바그너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라! 하나의 사상이 익어가는 동안 시간은 마치 음악 속에서처럼 다른 방식으로 흐르나보다), 여러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동정이냐 사랑이냐라는 지점에서 바그너 및 쇼펜하우어와 결별하는 니체'가 서로로부터 과연 얼마만큼 먼 곳에 서 있는지를 곰곰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이 글은 정말 이것으로 마치자. 이런 이야기는 굳이 필자가 아니라도, 굳이 오늘이 아니라도 어짜피 삶에서, 글 밖에서 계속 이어지므로.


- 이진


[짧은 공연평: 슈타츠오퍼, 아이힝어 신연출, 바그너 <파르지팔> 9월 11일 공연]


본 연출에는 쿠퍼의 원숙하고도 심오한 연출을 기억하던 청중과 비평 양자로부터 많은 비판이 쏟아졌지만,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최소한 <파르지팔>이 겨냥하고 있는 고통(혹은 수동성)과 폭력의 직접적인 관계를 분명히 드러냈다는 점 만큼은 평가하고 싶다.

앞서 적었던 1막과 3막에서 성배기사단이 보여주는 폭력성은 렌호프 연출에서도 훌륭했지만, 성배 곧 심장을 썰어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행진곡을 부르는 아이힝어의 1막 연출은 객석에 큰 충격을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가 선정성으로 매도되지 않으려면 전체적으로 극에 대핸 일정한 논리가 설득력있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선 1막의 '시간이 공간으로 되는' 순간을 보자. 진정 성스러운 것 즉 이 지구라는 대지와 그 위에 함께 살고 있는 생명체들이 전쟁과 파괴, 환경오염으로 고통받았던 긴 세월의 편린들은 회전하는 여러개의 스크린에 나란히 투사되었다. 동시에 나란히 존재를 허용하는 것이 '공간'의 주요한 본성이라고 볼 때 상당히 적절한 시도였다.

이어 2막 2장에 등장한 파르지팔이 1막과는 다른 십자군 복장을 하고 '이교도'의 땅을 쳐들어 가는 것으로 설정하여 '폭력'의 문제를 연출가가 계속 염두에 두고 있다는 심증을 굳힐 수 있었다.

3막에 있어 폭력의 문제는 현대 도시인에게 그 폭력성을 더이상 느끼지 못하게 될 정도로 흔해져버린 어느 광경을 통해 그려졌다. 도시인들이 여유롭게 산보하는 뒤쪽의 넓은 무대와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는 썰렁한 노숙자의 잠자리는 철책으로 가로 막혀져 있고,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노숙자에 대한 무관심, '비정상적인 삶'에 대한 경멸이 그 자체로 폭력적임을 잘 부각시켰다.





이 날의 음악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바라고 평할 것이 없었다. 특히 2막은 숨도 못쉬고 지나간 듯한 굉장한 연주였다.

같은 날 포츠담광장의 필하모니 홀에서는 거리를 생각하면 의외로 베를린에서 만나기 어렵던 얀손스와 콘체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말러6번이 연주되었기에 공연의 선택에 있어 상당히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돌아보면, 이날의 연주는 "바렌보임-슈타츠오퍼-바그너" 라는 조합 앞에서는 망설이지 말자는 필자 나름의 신조를 재확인해주는 훌륭한 것이었다.

건강이 걱정될 만큼 초인적인 일정으로 슈타츠오퍼에 열정을 쏟아붙는 이 사람이 지휘대에 서는 날이라면 시간과 생활비를 어떻게든 쪼개서 연주회장을 찾아가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끝)
[펌] 아래 글에 대한 김원철님의 의견 및 제 답변입니다. | 바그너 환자의 망상 포스트 삭제 2005/10/30 13:03

http://blog.naver.com/wagnerian97/40019029011
출처 : 새롭게 피어나는 꿈
김원철 (wagnerian): 잘 읽었습니다. 많은 것을 새로 깨닫게 하는 글이로군요. 그런데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두 군데 있어 이진님의 의견을 여쭙습니다.

1.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할 당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진님께서는 그 이전 작품인 <탄호이저>에서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고 하셨군요. 훗날 바그너가 <탄호이저>의 몇몇 부분을 새로 오케스트레이션하거나 없던 부분을 새로 추가하기도 했지만, 이진님의 논점은 음악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본에도 약간의 수정이 있었지만 군더더기를 없애는 정도였다고 알고 있거든요.

2. 이진님께서는 바그너에 영향을 끼친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해 ‘구원’과 그에 따르는 개념들에 초점을 맞추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욕정의 완전한 평정’을 얘기한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바그너는 성애를 통한 ‘열광적인 기쁨과 황홀’을 얘기했다는군요. 아래 링크의 첫 페이지에 인용된 엄선애의 글을 참고하세요. 이진님은 1858년 10월 서신을 인용하셨지만, 엄선애가 인용한 서신은 같은 해 12월 것입니다. 10월 서신에 나타난 바그너의 태도가 어떤지는 저의 독일어 실력이 엉터리라 알 수 없군요.

http://wagnerian.ecomstation.co.kr/wagner/tristan/sexuality_rhyth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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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 역시 쇼펜하우어의 영향에 대한 논의가 <탄호이저>와 관련하여 그다지 자주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잘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논의를 위해 정리하겠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출간된 것은 1819년이지만 그의 사상은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전역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냉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그너는 이 책을 1854년 가을에서야 발견하여 다음 해 여름까지 4차례에 걸쳐 통독했다고 합니다. 한편 문제의 <탄호이저>는 1845년 초연되고 1861년 수정되기 때문에 설령 두 사람이 1845년 시대적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이 작품에서 '쇼펜하우어의 결정적인 영향력'을 말하기는 힘들다는데 동의합니다.

글을 몰아쓰면서 '<탄호이저>에서 펼쳐진 바그너의 세계관과 쇼펜하우어의 사상에서 깊은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견해와 뒤에 이어진 '<트리스탄과 이졸데> 및 <파르지팔> 에서 동 철학자의 결정적인 영향력이 발견된다'는 생각을 한 문장 안에 우겨넣다보니 오해살 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후 수정하겠습니다)

그런데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삶과 철학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한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쇼펜하우어 사상에 급격히 빠져들게 되었던 것은 그 안에서 '이미 자신 안에 움트고 있었던 세계관과 본질적인 부분에서 공감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게다가 <탄호이저> 초연 보다 훨씬 이후인 니체와 바그너의 결별과 관련해서도 이 작품은 시간의 순서를 거스르는 듯한 묘한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탄호이저> 자체에 대한 생각은 다른 기회에 더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2. 두번째 지적하신 '열광적인 기쁨과 황홀'은 사실 제가 '함께 슬퍼함 혹은 연민'의 짝으로 등장시킨 '함께 기뻐함Mit-Freude'이라는 개념과 동일합니다. <파르지팔>을 쇼펜하우어적인 '함께 슬퍼함'이라는 개념에 묶어서만 생각해야 한다면 제가 따라간 생각의 끝인 '함께 기뻐함'이라는 결론은 길을 잃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10월이나 12월 편지에서 언급된 '함께 기뻐함'이라는 바그너 자신의 언급에서 <파르지팔>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가능성이 열릴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이 제가 전하려던 생각입니다. 따라서 10월 편지과 12월 편지의 입장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 글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심취해있던 1858년 10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 보낸 한 편지를 보면 자신의 본성 그리고 예술적 성취의 근원이 연민(Mitleid)임을 고백하면서도 사랑 속에서 너무도 어렵게 얻어지는 기쁨(Mit-Freude)은 그에 대한 단순한 보완 이상이라고 적고 있음이 흥미롭다"

이와 같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사상이 동일시될 수 없는 지점이 바그너가 동 철학자에 심취해 있던 시기 한가운데에서 발견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다시 앞의 답변에서 말씀드렸던 니체와 바그너의 결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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