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5일 금요일

베이스 전승현(Attila Jun), 슈투트가르트에서 '캄머젱거' 칭호 획득!

바그너발퀴레》 1막에서 훈딩 역을 맡은 베이스 전승현

캄머젱거(Kammersänger)는 마이스터징거(Meistersinger)와 비슷한 명예 호칭입니다. (한글 표기는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외래어표기법을 따랐습니다.) 마이스터징거가 14~16세기 조합(길드)에서 주던 것이라면 캄머젱거는 왕이나 왕자가 주던 것으로 당시 이름은 호프캄머젱거(Hofkammersänger)였습니다. 본디 어마어마한 상금이 뒤따랐는데, 요즘은 상금이 없는 명예 호칭으로 바뀌었고 정부 기관에서 준다고 합니다. 현대 독일-오스트리아 가수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예라 할 수 있습니다.

캄머젱거 호칭은 단순히 노래를 잘하거나 인기가 많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 시(詩)를 올바로 이해하고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아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칭호를 독일 사람이 아닌 한국 사람이 받았다는 사실은 대단한 쾌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그너 가수로 이름난 베이스 전승현(Attila Jun)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전승현 씨는 얼마 전에 슈투트가르트 《파르지팔》에서 구르네만츠 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오페라 전문 블로거로 이름난 'La Cieca'라는 사람이 쓴 리뷰에서 전승현 씨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안타까웠던 기억이 납니다. (☞ 영어 원문 보기) 그런데 아래 기사를 보니 연습을 아예 못하고 바로 무대에 올랐던 모양입니다. 오히려 전승현 씨가 언제나 준비된 바그너 가수였음이 이 사건으로 증명되었다 하겠군요.

『슈투트가르트 차이퉁』 기사 보기

위 기사를 소프라노 임선혜가 우리말로 옮겨서 싸이월드에 올린 것을 퍼왔습니다. (☞ 임선혜 싸이월드)

임선혜 씨는 전승현 씨의 독일어 이름 'Attila Jun'을 독일식 발음을 살려 '아틸라 윤'이라 옮겼네요.

베이스 전승현-나는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았다.

작성자 임선혜
작성일 2011.03.25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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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ila Jun, 아띨라 윤으로 불리우는 베이스 전승현.

그가 99년부터 상임단원으로 몸 담고있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극장에 그는 KAMMERSAENGER(캄머쟁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얻었다.

우연히 리허설에서 그 일에 알게 되었고, 사람들 말대로 인터넷을 찾아보니 3월21일자로 Stuttgarter Zeitung(슈투트가르터 짜이퉁)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났었다.

전승현 선배를 리허설할 때 만나기도 했고, 그 집에 초대받아 밥도 함께 먹었으며, 나와 성악가 동기인 그 와이프와 요즘 자주 전화를 했었는데 '캄머쟁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더랬다.

그의 과묵한 성격과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에 담지않는 신중함 그리고 세계 무대로 노랠하러 다니면서도 자랑이나 잘난 척과 거리가 아주 먼 그의 지금까지의 그의 행보에의 일관성이 읽혀졌다.

외국에서의 활동에 비해 정작 고국에서는 음악 전문가에게도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그. 여기도 마찬가지지만 거리가 먼 고국에서는 아무리 인터넷 시대라해도 스스로 PR하지 않는 이는 잘 알아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늘 있던 차, 나의 변변찮은 독일어 실력을 빌어 그의 기사를 번역해보려한다.


Stuttgarter Zeitung 3월 22일

나는 내 자신에게 아직 한 번도 만족해본 적이 없다.

슈투트가르트- 이미 1999년에 파멜라 로젠베륵(주:당시 캐스팅다이렉터)은 당시25살이던 한국인 베이스 아띨라 윤을 슈투트가르트국립오페라에 앙상블로 데리고왔다. 그러나 윤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바그너 역할에 있어서도 세계적으로 러브콜을 받는 게스트다. 대화 중에 우리는 이 친절한 베이스가 말하듯 왜 '한국인이 늘 배우는지'를 알게된다.

"우리에겐", 아띨라는 말한다.- 그리고 그의 우리란 그가 거의12년을 몸담아온 슈투트가르트 국립오페라극장도 아니고, 지금 그가 자신의 가족과 살고있는 오스트필던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한국을 말할 때 "우리"라고 말한다. 자신의 고국인. 윤의 뿌리는 깊다. 우리도 역시 그걸 느끼는데 - 예를 들면 그가 부드러운 B를 강한 P를 내는 입모양으로 만들거나 어두운 모음을 길고 더 검은빛으로 만들거나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그너의 두운들을 그는 아주 명확하고 완벽하게 말한다. 그는 아무도 길거리에서 말하지않는 "그것을 배우는 것은 재밌다" 라고 말한다. 그건 극이니까.

아띨라는 바그너의 말을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다. "이 음악은 내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바그너 음악을 사랑한다. 아직 그가 전설적인 바그너 베이스인 한스 소틴 제자로 쾰른에서 공부하는 학생일 적에 이미 그는 바이로이트에서 작은 역할들을 해왔었다. 그러나 그는 구르네만츠, 하겐, 왕 마르크 같은 역할도 이제 그 초원(바이로이트)에서 노래하고싶다 (2013년 새로 시작되는 '링'시리즈에 아직 하겐 역할은 비어있는 상태다. )

바그너의 베이스역할들을 윤은 모차르트 자라스트로나, 코멘다토레나, 베르디의 뿌름, 페란도,그로서인쿠이지토어, 스파라푸칠레, 아니면 차이쿠프스키의 그레민- 그가 이미 슈투트가르트에서 노래한- 역할들보다 사랑한다. 오페라극장 로비에서 인터뷰를하는 동안도 그는 바그너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나쁜 알베야, 나 너를 듣고있다" 하며 자신만의 어둡고, 폭넓으며 음량이 풍성한 화가난 하겐의 대사를 읊고, "그 곳으로부터 이 신음이 나온다!" 하며 구르네만츠를 연이어 소리쳐본다.

이 역할의 그를 지금 여기 국립극장에서 들을 수 있다. 2010년 이 파르지팔 프로덕션의 프레미어와 그 시리즈는 슈테판 밀링이 게스트로 초대되어 불렀었다. "보아하니 나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고 아띨라는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다른 이들의 그 "못 믿음"이 내겐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건 나를 열심히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되면 나는 내가 그걸 잘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보이고싶게된다. 오히려 남들이 다들 칭찬을 할 때, 그 때가 훨씬 더 어렵다. (밑줄: 역자, 왜? 넘 멋진 맞는 말이니까!! ^^)

윤은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많이 배우고, 계속 배운다!

윤은 기꺼이 배우고, 더 많이 계속해서 배운다. "공연이 끝나고 늘": 분명 한국인들이 그렇게 대대로 해왔 듯 그는 그렇게 배운다. "한국은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자연자원이 없는 작은 나라이다. 우리는 둘러쌓인 산 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그래서 한국인들을 많이 배워야한다" - 한국의 부모에게는 자녀들의 교육에 관한 것들이 늘 최고 우선이라고 윤은 말한다.

한국인은 늘 배운다: 그리고 아띨라 윤은 이렇게도 말한다.-자신의 유수한 한국동료들이 "좋은 소리" 를 더불어, 늘 배우는 자세에 있는 것이 독일 극장들에서 그들이 활약하는 이유라고 확신했다.

그 다음 요소는 분명 그들의 융화능력에 있을 것이다. 그건 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독일의 상점이 닫는 시간대에도 그는 적응이 되었다. "처음엔 대부분의 휴일들에는 집에 먹을게 없었어요."(주: 10 여년전 독일 상점은 평일엔 저녁 6시 이전에, 토요일엔 2시에 문을 닫았고 일요일은 여는 곳이 없었다. ) 그리고 한국적으로 생겨난 배움에의 욕심, 점점 증가되는 자기 맘 안에서의 불안함이 있는 것을 그는 기본적으로 긍정적으로 본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다. 그리고 아직 한번도 제대로 내 자신에 만족해 본 적이 없다.아직 100 %를 해낸 적이 없다. 공연이 끝나고는 늘 몇시간 동안이고 잠을 못 들고 깨어서 분석을 해본다. 어떤 걸 더 잘 할 수 있어야했는지."

슈투트가르트의 '파르지팔' 공연을 미룬 것은 득이된 면도 있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파르지팔 프레미에레가 올라가는 동안, 윤은 바르셀로나에 저명한 떼어뜨로 리세우에서 마르케랑 역으로 초대받은 것에 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트리스탄' 에서의 성공으로 그는 이 스페인의 저명하고 거대한 극장에서 곧 바로 5개의 계약서를 주머니 속에 넣어오는 쾌거를 올렸다.

슈투트가르트 '파르지팔' 리바이벌 공연의 리허설 기간은 말도 안 되게(문제가 될 정도로) 짧았다: 실제로 첫 번째 공연에서 그는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반주에 노래를 한 것이었다 - "그것도, 무대에서 쏜 안개로 앞의 지휘자를 거의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라고 그는 말했다. 다행히도 이제 그에게는 씬들과 거의 맞춰볼 수도 없었던 음악적으로 난해한 부분들을 매스터할 정도로 몸에 배어진 많은 경험이 쌓여있었다. 이제 그는 정확히 안다. 처음엔 그를 "미쳐버리게 만들었던" 무대 작업의 어려움들을 잘 운전해내는 방법을. 그리고 그는 음악감독 만프레드 호넥을 좋게 평가한다. "그는 내가 부드러운 부분들을 피아노로 잘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며 그럴 때 오케스트라를 아주 조용하게 만들어 배려한다".

언젠가 그가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내가 더 이상 소리를 못 낸다면", 그렇다면 yes. 그 전에 아띨라 윤은 계속 노래를 할 것이다. - 아직 그의 바그너 레파토리에서 빠져있는 마이스터싱어의 포그너를 젤 노래하고싶다. 또 그 전에, 크레모나에서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그의 남동생은, 이제 다섯살 된 윤의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사람들은 그를 캄머쟁어라 부를 것이다. 벌써 다음 달이면 이제 그렇게 된다. "나에게 이것은 하나의 큰 영예이다." 라고 윤은 말한다. "지금까지 한국인으로서는 함부루크의 헬렌 권이 유일했기에 아주 큰 영예다." 그것은 아띨라 윤에게 긍지를 가져다주었다.

www3.stuttgarter-zeitung.de/inhalt.attila-jun-ich-war-noch-nie-mit-mir-zufrieden.e42c4075-dae8-4c10-a0d8-8a6a2a9a2bdf.html?page=0

위이 페이지에서 원본을 볼 수 있음.. 더 좋은 문장으로 고쳐주셔서 아주 감사하게 여기겠음! ^^

칼릭스토 비에토 연출의 파르지팔에서 구르네만츠를 연기하는 전승현 (아띨라 윤). 슈투트가르트 국립극장


선배가 전씨라 JUN 이라 쓰는데, 독일 사람들이 이것을 '윤'으로 읽어버리고만다. 이제 너무 유명해져서, 이거 '전'이라고 읽는 거야해도 고쳐지려면 백년 걸릴 듯. ^^

암튼.. 너무 조용히, 신중히, 열심히 하고있는 나의 자랑스런 선배이자 친한 친구의 남편인 베이스 전승현의 영광스런 캄머쟁어 타이틀, 너무 축하하는 바이다!

극장에서 추천을 받아야하고, 극장장이 수락해야하며 그 다음에 시로 넘어가 평가가 들어가고 그 복잡한 절차를 거쳐 이 타이틀이 적합하다고 여겨질 경우에만 수여되는 얻기 어려운 타이틀인데,

아무리 한 극장에서 오래 노래를 했어도 이 타이틀을 얻고 떠나기 쉽지 않은 법인데 선배는 약관 서른일곱에 이 영광스런 명예를 얻었다. 자기 커리어를 접으며 내조에 힘쓰는 디보의 아내 김성미의 수고에도 그 좋은 열매가 있었음을 함께 감축드리는 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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