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10일 토요일

스카를라티 피아노 소나타,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2번, 리스트 단테 소나타, 쇼팽 스케르초 2번, 파가니니의 추억, 뱃노래, 발라드 4번

통영국제음악당 공연 프로그램북에 실릴 글입니다.


스카를라티: 3개의 소나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지만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스카를라티 음악은 바로크-고전주의 과도기적 양식이면서 에스파냐 느낌도 살짝 나지요. 건반악기 소나타에서는 기타(guitar)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 스카를라티가 남긴 건반악기 소나타는 555곡이나 되는데, 작곡가 생전에 제대로 출판도 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오늘날에는 스카를라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쇼팽, 브람스, 버르토크 등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요. 모두 단악장 곡으로 짤막합니다.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2번 g♯단조 Op. 19

스크랴빈의 초기 작품은 얼핏 들으면 쇼팽 곡 같습니다. 잘 들어보면 드뷔시 느낌도 조금 나지요. 스크랴빈은 밤바다를 생각하면서 이 곡을 썼다고 하는데, 1악장을 듣고 있으면 바다에 일렁이는 물결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해요. '발전부'에 해당하는 곳에서는 물속 깊은 곳으로 잠기는 듯하기도 하고요. 2악장에서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표현했다는데, 파도가 사납게 몰아치기보다는 그 와중에도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이 얼핏 보입니다.

리스트: 〈순례의 해〉 중 두 번째 해 제7곡 '단테를 읽고: 소나타 풍 환상곡'

'단테 소나타'라고도 부르는 이 곡은 단테의 『신곡』을 음악에 담은 작품으로 빅토르 위고의 시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합니다. '악마의 음정'이라 하여 전통적으로 금기시되었던 증4도(또는 감5도) 음정과 파격적인 불협화음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지옥을 그리고, '지옥' 음형을 평화로운 느낌으로 변형해 대비시키는 짜임새로 20분 가까이 이어가며 오늘 공연 1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걸작입니다.

쇼팽: 스케르초 2번 b♭단조 Op. 31

"만약 '농담'이 검은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면, '진담'은 무슨 옷을 입어야 할까?" 슈만이 쇼팽의 스케르초를 두고 한 말입니다. 스케르초(Scherzo)는 본디 농담이나 해학을 뜻하는 말이지요.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에는 기교를 과시하거나 리듬과 다이내믹 등의 변화가 큰 피아노 소품에 '스케르초'라는 이름을 붙일 때가 잦았습니다. 그 가운데 쇼팽의 스케르초는 참 우울하지요. 냉소나 풍자도 아니고 그냥 우는 얼굴로 하는 슬픈 농담 같습니다. 우아하게 울부짖는 듯한 스케르초 사이에 애수 띤 트리오가 있는 짜임새입니다.

쇼팽: 파가니니의 추억 - 변주곡 A장조

〈파가니니의 추억〉은 쇼팽이 19살 무렵 습작으로 쓴 곡입니다. 파가니니 〈베니스의 사육제〉에서 선율을 따왔는데, 누구나 들으면 '아하!' 할 거예요. 쇼팽은 이 선율을 아주 조금씩만 바꿔가면서 변주했고, 반주 음형은 거의 변화를 주지 않았고, 화음도 아주 단순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곡입니다.

쇼팽: 뱃노래 F♯장조 Op. 60

쇼팽이 죽기 3년 전에 남긴 걸작입니다. 연인과 함께 배를 타고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듯한 사랑스러운 곡이지요. 그런데 어찌 들으면, 이제는 잃어버린 추억을 슬프게 떠올리는 듯하기도 합니다. 이 묘한 느낌을 어찌 표현하느냐가 연주자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고, 그래서 귀로 듣거나 악보를 얼핏 봐서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이 작품이 수많은 피아니스트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다고 합니다.

쇼팽: 발라드 4번 f단조 Op. 52

발라드는 본디 14~15세기 프랑스 정형시가의 일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쇼팽의 발라드는 피아노 독주곡으로, 쇼팽이 '발라드'라는 기악곡 형태를 새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요. 악곡 형식으로서 발라드는 사실 변종 소나타 형식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보다 중요한 특징은 기악곡이되 그 속에 '이야기'가 있는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쇼팽 발라드에 담긴 '이야기'는 아담 미츠키에비치가 쓴 시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쇼팽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음악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의 정서적 '효과'를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은 그런 이야기 전달 방식에 발라드라는 '변종 소나타 형식'이 매우 효과적이어서 "필연적인 해법"이었다고까지 말했지요.

그러니까 원래 이야기가 뭐였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저마다 간직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선율을 따라가 보세요. 그곳에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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