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1일 토요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 베토벤 교향곡 3번

통영국제음악당 공연 프로그램북에 실릴 글입니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 77

브람스는 이 곡을 쓰면서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고 하지요. 작품에서 때로 느껴지는 즉흥적인 충동이 그 결과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풍부한 감성의 이면에 치밀한 논리가 있는 것이 브람스 음악의 특징인데, 이 작품에서는 논리와 충동의 긴장 관계가 나타난다고요.

브람스는 1악장 제시부에 4가지 주요 주제를 사용했습니다. 소나타 형식에 흔히 나오는 제1주제, 제2주제와 더불어 종결구 주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오케스트라 제시부에 없던 제3주제를 독주 바이올린이 제시하지요. 그런데 제2주제는 제1주제와 조성 관계로 구분되면서도 얼핏 제1주제와 비슷하게 들리기 때문에 자칫 헷갈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격렬한 종결구 주제가 앞선 주제군과 대조됩니다.

독주 바이올린이 처음 나오는 대목은 살짝 카덴차 느낌으로 앞서 말씀드린 즉흥적 충동이 두드러집니다. 격렬한 음형과 극적인 전개가 마치 기악 레치타티보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이 음형은 제1주제를 변형시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좀 더 뒤로 가서야 독주 바이올린이 제1주제를 온전히 제시합니다. 제2주제와 제3주제로 이어지는 과정 또한 제법 복잡합니다.

2악장은 세도막 형식, 3악장은 론도형식으로 1악장과 견주면 나머지 악장은 단순한 편입니다. 2악장에서는 애수 가득한 선율이 매력적이고, 3악장에서는 독주자의 불꽃 튀는 테크닉과 신나게 달리는 오케스트라가 흥미진진한 한판 대결을 펼칩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E♭장조 Op. 55 ‘에로이카’

‘에로이카’(영웅)라는 제목의 유래에 관해 오늘날 정설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베토벤의 제자였던 페르디난트 리스가 한 말입니다. 표지 제목에 ‘보나파르트’를 이탈리아식 철자로 쓰고 하단에 자신의 이름 또한 이탈리아식으로 ‘루이지 판 베토벤’이라 쓴 악보를 봤다고요. 그리고 널리 알려진 것처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격분해서 그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하지요.

아마도 베토벤의 자필 악보였을 그 악보는 유실되었습니다. 그 대신 베토벤이 감수한 필사본이 남아 있는데,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썼다가 지운 흔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박박 지웠는지 종이에 구멍이 나 있다지요. 베토벤은 나중에 ‘보나파르트’ 이름을 필사본에 다시 썼고, 악보를 출판하면서는 제목이 ‘보나파르트’가 맞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제목에 흥미를 느낄 것이라고도 했고요. 그러나 베토벤은 결국 제목을 ‘에로이카’로 확정했습니다.

이 작품의 짜임새는 제목만큼이나 장대합니다. 1악장만으로도 당시에 연주되던 어지간한 교향곡 전체 길이와 맞먹을 정도이지요. 악상을 전개하는 방식 또한 파격적입니다. 베토벤은 이 작품에서 단순 명료함을 미덕으로 여기던 고전주의 음악 양식에서 벗어나, 화성적 · 조성적 안정성을 계속 뒤로 미루면서 그야말로 ‘영웅의 투쟁’처럼 파란만장한 짜임새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음악에 충격을 받았고, 새로운 작곡 기법은 19세기 서양음악사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되었습니다.

음악학자 베리 쿠퍼는 이 작품의 내러티브를 영웅의 삶(1악장) → 영웅의 죽음(2악장) → 영웅의 부활(3악장) → 신격을 얻는 영웅(4악장)으로 보았습니다. 2악장이 장송행진곡인 까닭을 설명하는 해석으로 참고할 만하지만, 제 생각에 3악장을 ‘부활’로 보는 건 좀 억지스러워요. 이를테면 3악장을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4악장에서는 발레 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피날레 주제를 따서 쓰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진흙상을 사람으로 만들어 파르나소스 산으로 데려간다는 줄거리인데, 베리 쿠퍼는 ‘폭풍 → 진흙상 → 생명을 얻음 → 신격을 얻음’ 짜임새가 ‘에로이카’ 4악장에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는 ‘폭풍’에 이은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주제가 베이스 성부만으로 시작해 조금씩 온전한 형태를 갖춘 다음 변화하고 발전하지요.

베토벤은 공화정을 완성할 ‘현실의 프로메테우스’로 나폴레옹을 지목했고, 신화 속에서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으로 사람이 문명을 깨우친 것처럼 현실의 인류 또한 예술과 학문으로 신의 광휘에 끝없이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작품의 조성은 거룩한 음악에 곧잘 쓰이던 E♭ 장조이며, 특히 4악장에서 E♭ 장조 화음이 찬란함을 더해 가는 과정이 백미입니다.

이 작품을 연주할 때 베토벤 당시보다 오케스트라 크기를 늘리고, 당시 금관악기로는 낼 수 없던 음을 덧붙여 연주하는 등 웅장함을 부풀리는 관습이 특히 20세기에 유행했지요. 그러나 요즘에는 되도록 악보 그대로 연주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하노버 NDR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앤드루 맨지 또한 그런 추세를 이끌어 왔지요. 음악학자들이 새로 밝혀낸 것들이 반영될 이번 연주는 어떨지 기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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