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2일 토요일

상하이에 폭우가 내리던 날, 공연기획자의 이틀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공연 시작을 3시에서 5시로 연기합니다. 그때까지 연주자가 도착하지 못하면 공연을 취소하겠습니다."

하노버 NDR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 날 이른 아침에 내려진 결정이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하루 앞서 도착해 리허설하고 있었을 연주자가 상하이에 발이 묶여 있었지요. 폭우 때문에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했다고요. 토요일 밤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공연 시작 전에는 도착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상하이 공항에서 자꾸만 계획이 틀어지던 끝에 공연 시작 전까지 연주자들이 음악당에 도착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일요일 공연이라 평일보다 일찍 시작하기로 했던 것도 악재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약 보름 앞서 부산에 태풍이 몰려오는 바람에 첼리스트 레오나르트 엘셴브로이히와 피아니스트 알렉세이 그리니우크가 통영까지 이동하는 계획에 차질이 있었지요. 그날 제가 겪은 일은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발간하는 잡지의 '박신(剝身) 클래식' 코너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참말 큰 난리를 겪을 것을 꿈에도 모르고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그 글에 나오는 A 대리님께서 이번 공연 담당자였습니다.

A 대리님은 이틀 동안 굳은 얼굴을 한 채 끊임없이 누군가와 통화했습니다. 자세한 사정을 제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연주자가 많다 보니 생기는 문제였을 겁니다. 사람이 많으면 짐도 많지요. 공연을 하려면 악기 등이 사람보다 먼저 도착해야 하고, 차로 이동하는 경우 화물차는 보통 새벽에 출발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하이에서 화물이 출발하는 계획부터 자꾸만 틀어져서 마음을 졸여야 했습니다. 화물 도착이 늦어지는 바람에 통영국제음악당 무대기술팀이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지요.

연주자들은 둘로 나누어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선발대'는 그나마 조금 일찍 도착해서 리허설할 수 있었는데, 협주곡에 꼭 필요한 최소인원이 선발대로 결정된 듯했습니다.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 온 단원만으로 연주할 교향곡보다 협연자와 새로 호흡을 맞춰야 할 협주곡 리허설을 우선시하겠다는 결정은 상식적으로 타당했습니다. '후발대'는 연기된 공연 시작 시각이 불과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을 때 겨우 도착해서 전체 리허설 없이 무대에 올라야만 했지요.

저는 김해공항에 내린 선발대를 버스에 태우는 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A 대리님은 공항에 남아 후발대를 기다렸습니다. 버스는 호텔이 아닌 음악당으로 곧바로 이동했고, 연주자들은 짐 풀 새도 없이 리허설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버스가 통영 IC를 통과했을 때, 저는 마이크를 잡고 음악당의 연주자 전용 이동 경로, 지휘자 · 협연자 · 악장 · 기타 연주자들의 분장실 위치 등을 설명했습니다. 연주자들은 마지막 말을 가장 반가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복도에 샌드위치가 있을 겁니다."

우여곡절 끝에 5시가 되었습니다. 관객 앞에 선 플로리안 리임 대표님께서 서툰 한국어로 사정 설명과 함께 사과 말씀을 올렸고,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긴 시간 이동하느라 지쳐있을 연주자들이 실수하지 않을지 걱정이 들었습니다. 현악기보다 관악기가 더 걱정이었지요. '부는 악기'이니까요. 그러나 NDR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믿을 수 없이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고, 관악기 연주가 오히려 매우 훌륭했습니다. 잔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갈 만한 수준이었지요. 독일 명문 오케스트라의 저력이 이 정도인가 싶더군요.

베토벤 교향곡 3번 4악장에서 마치 파르나소스 산에 오른 듯한 느낌이 백미였습니다. 지휘자 앤드루 맨지의 작품 해석이 탁월했지요. E♭ 장조 화음이 찬란함을 더해 가는 과정도 멋졌습니다. 무엇보다 브람스 협주곡을 협연한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이 앙코르로 연주한 윤이상 《리나가 정원에서》 중 '작은 새'가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가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이 곡을 연주했지만, 최예은의 연주는 제가 이제까지 들어본 어떤 연주보다도 훌륭했습니다. 들으면서 눈물이 나더라는 관객도 있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지친 얼굴로 웃는 A 대리님 얼굴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습니다.

"긴 하루였습니다... 으어어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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