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4일 화요일

발레리 게르기예프, 마에스트로 아드 리비툼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호세 쿠라’라고 하는 매우 유명한 테너가 있다. 하노버 극장에선 축제 때 이 사람을 불러 베르디의 〈오텔로〉를 공연했다. 그는 공연 전날 밤늦게 비행기를 타고 와서 […] 그런데 웬걸, 어느 순간부터 혼자서 속도를 내어 마구 달리기 시작한다. […] 어제 그가 엄지를 치켜세우던 ‘딱 좋은 템포’는 이미 사라졌다. 이제 나는 결정해야 한다. […] 무대 위에선 서양 거인 한명이 미쳐 날뛰고, 무대 밑에선 조그마한 동양인이 지휘봉을 미친 듯이 휘두른다. 오케스트라는 곧 눈치를 채고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같이 달릴 준비를 한다. […] 모두들 극도의 집중으로 인해 다들 탈진했지만 정말 즐거웠던 것이다."

지휘자 구자범 선생이 예전에 한겨레신문에 썼던 칼럼에서 소개한 일화입니다. 유럽에서도 상급으로 쳐주는 오페라 극장에서는 즉흥적으로 이러기도 하나 봐요. 음악이라는 게 듣는 사람이나 연주하는 사람이나 그때그때 느낌이 다를 수 있으니까, 그 순간의 느낌에 집중하는 것이 미리 계산한 대로 하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겁니다. 작가들은 글을 쓰다 보면 때로 자신이 글에 끌려가는 듯한, 의도치 않은 내용을 그저 받아적기만 하는 듯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고 하지요. 어쩌면 어느 예술 장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애드립'은 라틴어 'ad libitum'(아드 리비툼)을 줄인 말로 본디 음악 용어인데, 다른 곳에서도 이 말을 흔히 쓰잖아요?

그런 즉흥성을 극대화한 음악 장르가 재즈이겠지만, 클래식 음악가 중에서도 정해진 틀 안에서 (때로는 그 틀을 아주 살짝 허물기도 하면서) 즉흥적인 영감을 살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미리 계획한 대로만 연주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더욱이 공연 중에는 돌발상황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특히 오페라 공연 때에는 돌발상황이 일상사라 할 수 있죠. 거장 지휘자들이 예외 없이 오페라 지휘자인 까닭이 거기에 있기도 합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즉흥적인 에너지를 가장 극단적으로 살리는 지휘자일 겁니다. 리허설은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공연 중에는 단원들에게 보내는 지시가 분명치 않아서 연주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때도 있다지요. 게르기예프는 때때로 '이쑤시개'를 지휘봉 대신 사용하기로 유명한데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음악적 관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무력화하고 그 순간의 영감과 에너지를 끌어내 분출시킬 수 있는 도구가 어쩌면 바로 그 '이쑤시개'일지도 모르겠네요.

게르기예프가 지휘한 음반 가운데, 이를테면 1998년 잘츠부르크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실황 녹음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미친 듯이 쏟아내는 명연주로 유명합니다. 단원들 콧대가 워낙 높아서 지휘자가 마음에 안 들면 '지휘자가 지시한 것보다 더 아름답게' 연주해 버리기로 유명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지만, 그 천하의 '빈필'도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니 오스트리아 소리가 아닌 러시아 소리를 내더라며 놀라워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조금 딴 얘기지만, 게르기예프는 피아니스트 조성진과의 인연으로도 유명합니다. 조성진은 2009년 고작 만 열다섯 나이로 하마마쓰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천재 피아니스트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다음 해에 쇼팽 콩쿠르가 있었지만 연령 미달로 참가하지 못했고, 그다음 해에 열리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도 마찬가지로 연령 미달이었습니다. 그런데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차이콥스키 콩쿠르 조직위원장 권한으로 조성진을 위해 참가 제한 연령을 기존 18세에서 16세로 낮췄습니다. 조성진은 그 덕분에 3위에 입상했고, 아시다시피 4년 뒤에 다시 열린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지요.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가 오는 8월 2일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과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1번,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1번 등을 공연합니다. 피아니스트는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아들인 아비살 게르기예프예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오페라 극장인 '마린스키 극장'에 소속된 오케스트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악단입니다. 러시아 명문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러시아 음악, 거기에 러시아 거장 지휘자가 순간의 에너지를 모아 폭발시키는 것을 현장에서 경험하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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