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31일 일요일

2017 올해의 공연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한국 전통음악, 그중에서도 특히 정악(正樂)은 비트(beat)가 아닌 호흡으로 음악이 분절된다는 점에서 서양음악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 서양 현대음악의 겉모습을 하는 작품이지만, 살아 움직이는 음향층을 구성하는 개별음들이 생장하며 쉬는 '숨'에서 ‹낙양›이나 ‹예악›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한국적 조화로움이 느껴진다. 한국인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질 그 숨을 함께 쉬는 일은 연주자에게도 감상자에게도 중요해 보인다."

윤이상의 1976년 작품 ‹협주적 단편›(Pièce concertante)에 관해 제가 썼던 글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인상 깊었던 공연을 되새기다 보니 '윤이상 솔로이스츠 베를린' 공연이 생각났고, 그 가운데서도 이 곡이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떠오르더군요. 통영국제음악당의 뛰어난 음향과 더불어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윤이상 전문가들의 연주로 들었던 ‹협주적 단편›은 2016년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이 통영에서 연주했던 진은숙, 리게티, 윤이상 음악에 견줄 만했습니다.

음악평론가 박제성 선생이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내한 연주회 이후 가장 격양되고 찬연하며 성스러웠던 한국에서의 베토벤 피아노 리사이틀"이라 극찬했던 루돌프 부흐빈더 베토벤 사이클, 조지 크럼 ‹블랙 엔젤스›를 실연으로 들어본 일이 가슴 벅찼던 크로노스 콰르텟 공연, '러시아 음악의 진수'라는 진부한 표현이 참으로 진솔하게 느껴졌던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 게르기예프, 티켓 예매부터 팬 사인회까지 수많은 화제를 일으켰던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 윤이상 음악 해석의 한국적인 모범을 제시했던 고봉인 첼로 리사이틀 등이 또 기억에 남습니다.

서울에서 보았던 공연 중에서는 지난 7월 롯데 콘서트홀에서 있었던 ‹우리시대 작곡가 진은숙›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공연하려다 예산 문제로 몇몇 장면을 발췌해 피아노 독주곡과 함께 콘서트 버전으로 연주했던 공연이었고, 전막을 실연으로 본 일이 없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이렇게나마 들어보는 느낌이 각별했지요. 특히 앨리스 역 레이철 길모어(Rachele Gilmore)가 멋졌는데, 영국 사람이 영국 악센트로 노래하니 느낌이 역시 다르구나 생각했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인이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도 납니다.

올해 본 공연 가운데 가장 멋졌던 것은 여름휴가 때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보았던 바그너 오페라 ‹파르지팔›입니다. 저는 그동안 바이로이트에 몇 번 가보았지만, 그때마다 스케줄이 안 맞아서 ‹파르지팔›을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지요. 바그너는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하려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하우스라는 특이한 오페라 극장을 지었고, 극장이 완공된 뒤에 ‹파르지팔›을 새로 작곡했지요. 그러니까 ‹파르지팔›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하우스의 음향 특성에 가장 잘 맞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파르지팔›의 느리고 신비로운 음악이 이른바 '바이로이트 사운드'와 만나 극장 안에서 몽환적으로 넘실거리는 느낌은 과연 놀라웠습니다. 특히 1막이 끝났을 때에는 제의적인 분위기에 압도되기도 했지요. 이런 제의적 성격 탓에 본디 ‹파르지팔› 1막이 끝났을 때에는 손뼉을 치지 않는 것이 바그너 애호가들의 전통이지만, 이날은 그것이 지켜지지 않은 탓에 제 옆자리에 앉았던 네덜란드 사람이 몹시 안타까워하던 기억도 나네요. 2016년 루체른 페스티벌 개막공연에서 봤던 테너 안드레아스 샤거가 파르지팔 역으로 나온 것이 반갑기도 했습니다.

바이로이트에서 새 연출로 선보인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는 발터와 애바의 이야기를 바그너와 코지마의 이야기로 각색한 연출이 재미있었습니다. 전주곡이 흐르기 전에 나오던 자막부터 웃겼지요. 1875년 8월 13일 12시 45분. 바그너 저택 반프리트. 실외온도는 섭씨 23도(여기서부터 관객 폭소). 그리고 ‹라인의 황금› 공연 날에는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천둥의 신 '도너'(토르)가 망치 '묠니르'로 먹구름을 한 방에 날려버리고, 하늘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신들이 발할 성으로 입장하면서 오페라가 끝났지요. 그리고 밖에 나오니 정말로 하늘에 무지개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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