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5일 화요일

엘 시스테마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엘 시스테마 철학을 바탕으로 교육을 수행합니다."

"음악적 성취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를 통한 아동의 자존감 고취와 지역사회의 문화공동체 활성화를 목적으로 교육프로그램 및 특별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실행합니다."

"사회적, 가정적 돌봄이 부족한 사회적 취약계층 아동의 안정적인 교육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돌봄 및 격려기제 기획 및 실행합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추진하는 '꿈의 오케스트라' 사업 설명에 나오는 말입니다.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도 사업 거점기관으로 참여해 '꿈의 오케스트라 통영'을 운영하고 있지요. 베네수엘라의 무상 음악 교육 사업인 '엘 시스테마'(el sistema)는 예술이 사회에 이바지한 실증적 사례로 국제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때마침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로 대표되는 엘 시스테마 출신 스타 음악가들이 등장하면서 엘 시스테마를 모방한 교육 사업이 세계적으로 유행했습니다.

엘 시스테마를 창립한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지난 3월 말 향년 79세로 타계했습니다. 그동안 엘 시스테마 사업이 베네수엘라 독재정권의 나팔수로 이용되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나마 역대 정권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타계한 아브레우의 후임으로 베네수엘라 독재정권의 인물이 엘 시스테마 사업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엘 시스테마가 낳은 스타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은 베네수엘라 독재정권을 비판한 이후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아브레우 타계 직전 에스파냐 국적을 얻었습니다.

베네수엘라는 경제 위기 끝에 지난해 말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실상 국가 파산 상태로 현재 국민의 생활 수준은 한국으로 치면 1953년 정전협정 직후의 잿더미 상태와 견주어야 할 듯합니다. 엘 시스테마의 전성기였던 차베스 정권기에는 독재정권이었을망정 경제정책과 에너지지정학적 환경 등이 잘 맞아떨어져 베네수엘라가 남미의 신흥강국 정도로 여겨지기도 했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참 세상사가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원조' 엘 시스테마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합니다. '꿈의 오케스트라'와 같은 한국형 엘 시스테마 사업이 앞으로는 '원조'와 거리를 두고 앞날을 고민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원칙과 철학, 그리고 현실적인 정책일 겁니다. 이와 관련해 음악정책학자 노승림 선생이 한 말을 인용할게요:

"영웅신화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법이지만, 지금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건 신화가 아니라 실현가능한 정책입니다. '음악이 세상을 구원할까?'라고 묻는다면, 그건 '시스템에 달려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현실 정책의 결실이 아닌 로또처럼 발견된 유전, 그리고 차베스의 독재가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가 아는 '엘 시스테마'와 아브레우는 과연 존재했을까하는 것이 제가 던지는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그리고 강조하건대, 이건 좌우파의 문제가 아닙니다."

노승림 선생은 엘 시스테마가 "국내에서는 '음악교육을 통한 개천에서 나온 용 양성' 비슷하게 취지가 왜곡"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첫머리에 인용한 '꿈의 오케스트라' 사업 설명을 잊지만 않는다면, 실제로 '개천에서 나온 용'을 가까운 곳에서 경험해 보는 일 또한 값진 일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엘 시스테마'가 낳은 스타이자 불과 17살에 베를린필 최연소 단원이 되어 화제가 되었던 천재 베이시스트 에딕손 루이스가 오는 7월 7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공연합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더블베이스로 연주하는 바흐 첼로 모음곡 1번과 가브리엘리 리체르카레 6번 G장조와 같은 바로크 음악, 엘리엇 카터, 루치아노 베리오 등의 20세기 음악, 아스토르 피아솔라의 탱고, 그리고 에프라인 오스체르 '베네수엘라풍의 바로크 4번' 등 다채로운 작품이 연주될 예정이니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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